돈 시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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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돈 시겔(Don Siegel)은 1912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 제작에 입문하여 몽타주 부서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단편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예산과 각본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출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다. 특히, 1956년 영화 《신체 강탈자》는 "SF 장르의 시금석"으로 평가받았다. 시겔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여러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하며 그의 감독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91년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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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시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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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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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도널드 시겔 |
출생일 | 1912년 10월 26일 |
출생지 | 일리노이주 시카고 |
사망일 | 1991년 4월 20일 |
사망지 | 캘리포니아주 니포모 |
직업 | 영화 감독, 프로듀서 |
활동 기간 | 1939년–1984년 |
배우자 | 비베카 린드포르스 (1948년 결혼, 1953년 이혼) 도 에이베던 (1957년 결혼, 1975년 이혼) 캐롤 리달 (1981년 결혼) |
자녀 | 5명, 크리스토퍼 태버리 포함 |
발음 | |
영어 발음 | IPA: /ˈsiːɡəl/ |
한글 표기 | 시걸 |
대표 작품 |
2. 초기 생애
시겔은 1912년 시카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만돌린 연주자인 새뮤얼 시겔이었다.[2][3]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예수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잠시 파리 보자르에서 공부했지만, 2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로스앤젤레스로 갔다.[4]
어린 시절 아버지의 순회 공연으로 미국 각지를 전전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영국 왕립 연극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갔다. 1931년 귀국하여 삼촌이 워너 브라더스에서 일했기 때문에 1934년 워너 브라더스에 입사했다.
2. 1. 가족 배경과 성장 과정
시겔은 1912년 시카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2] 아버지는 만돌린 연주자인 새뮤얼 시겔이었다.[3] 어린 시절 아버지의 순회 공연으로 미국 각지를 전전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4]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영국 왕립 연극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리 보자르에서 잠시 공부했지만, 2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로스앤젤레스로 갔다.[4] 1931년 귀국 후, 삼촌이 워너 브라더스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4년에 워너 브라더스에 입사했다.[4]
2. 2. 학창 시절
시겔은 1912년 시카고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만돌린 연주자인 새뮤얼 시겔이었다.[2][3] 그는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예수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잠시 동안 파리 보자르에서 공부했지만, 2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로스앤젤레스로 갔다.[4]어린 시절부터 만돌린 연주가인 아버지의 순회 공연으로 미국 각지를 전전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영국 왕립 연극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그 후 다시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갔다.
3. 경력
돈 시겔은 할 윌리스의 소개로 워너 브라더스에서 일자리를 얻어 몽타주 부서 책임자로 승진, 수천 편의 몽타주 시퀀스를 연출했다.[4] 1945년에는 그가 연출한 두 편의 단편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장편 영화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시겔은 예산과 각본의 한계를 넘어선 작품들을 만들었다. 1956년 영화 ''신체 강탈자(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는 "SF 장르의 시금석"으로 묘사되며 세 편의 리메이크작을 낳았다.[5] 텔레비전에서는 ''황혼의 영역'' 두 에피소드와 ''제시 제임스의 전설'' (1965) 프로듀서로 참여했다.[6] ''라인업'', ''타오르는 별(Flaming Star)'' (1960), ''지옥의 영웅들(Hell Is for Heroes)'', ''킬러들'' (1964) 등에서 여러 배우들과 작업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쿠간의 함정(Coogan's Bluff)'', ''더티 해리(Dirty Harry)'', ''사라 부인에게(Two Mules for Sister Sara)'', ''매혹당한 사람들'', ''알카트라즈 탈출(Escape from Alcatraz)'' 등 5편의 영화를 함께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시겔은 이스트우드의 감독 경력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를 시겔과 세르지오 레오네에게 헌정했다.
시겔은 랄로 시프린(Lalo Schifrin)과 협력하여 영화 음악을 담당하게 했고,[7] 샘 페킨파(Sam Peckinpah) 감독 경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페킨파는 ''감방 11호의 폭동(Riot in Cell Block 11)'' 대사 코치로 고용되어 시겔의 조수 역할을 했고, 시겔 영화 네 편에서 대사 코치로 일했다.[8]
어린 시절 만돌린 연주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각지를 전전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배우고 프랑스에서 생활했다. 1931년 귀국, 워너 브라더스에서 일하며 몽타주 기술을 익혔다. 1944년 워너와 계약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하워드 혹스 감독의 『탈출』 조감독 참여 시 현장 출입을 금지당했다. 1945년 단편 영화로 감독 데뷔,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1946년 장편 영화 데뷔를 했다. 이후 주연 여배우와 결혼했으나 영화계 쇠퇴와 함께 워너에서 해고되었다. 9개월 실업 후 로버트 로센 감독의 올 더 킹스 맨 제2팀 감독, 하워드 휴즈 초청으로 RKO에서 영화를 찍는 등 B급 영화를 만들었다.
1954년 ''제11호 감옥의 폭동'' 제작, 샘 페킨파가 감독 조수로 참여했다. 1950-196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도 했다. 1964년 『킬러들』은 극장 공개되었다. 1968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매혹의 도시』 감독으로 결정, 촬영을 통해 의기투합하여 1971년 『매혹의 밤』을 발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시겔은 최고 걸작으로 평가했다. 같은 해 『더티 해리』가 흥행하며 이름을 알렸다. 1970년대 『특공대』, 『드라블』, 존 웨인 유작 『라스트 슈터』, 『텔레폰』 등을 찍었다. 1979년 『알카트라즈 탈출』은 이스트우드와 마지막 작품이다. 1980년대 프로듀서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유작 『징크스!』에서는 제자 샘 페킨파가 참여했지만, 2년 후 페킨파는 사망했다.
3. 1. 워너 브라더스 시절 (1934-1948)
돈 시겔은 할 윌리스의 소개로 워너 브라더스 영화 자료실에서 일자리를 얻었다.[4] 이후 몽타주 부서 책임자로 승진하여 카사블랑카의 오프닝 몽타주를 포함, 수천 편의 몽타주 시퀀스를 연출했다.1944년에는 워너와의 계약 문제로 몇 달 동안 일을 못하게 되는 등 굴욕을 맛봤다. 그 후 하워드 혹스 감독의 『탈출』 조감독으로 참여했을 때는, 워너에 대한 복수심으로 엑스트라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한 것이 들통나 현장 출입을 금지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1945년 단편 영화 ''밤의 스타(Star in the Night)''로 감독 데뷔하여 아카데미상 단편 영화상을 수상했고, 나치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히틀러는 살아있다(Hitler Lives)''로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1946년에는 ''The Verdict''로 장편 영화 데뷔를 했다.
장편 2번째 작품 ''Night Unto Night''에서는 주연 여배우 비베카 린드포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1953년 이혼), 이미 영화계는 쇠퇴의 조짐을 보였고, 1948년에는 워너도 업무 개선을 위해 시겔을 비롯한 많은 사원을 해고했다.
3. 2. B급 영화와 텔레비전 (1949-1964)
돈 시겔은 예산과 각본의 한계를 뛰어넘어 흥미롭고 숙련된 작품을 제작하며 어떤 종류의 자료든 연출했다. 1956년에는 "운명론적인 걸작"이자 "SF 장르의 시금석"이라고 묘사되는 영화 ''신체 강탈자(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를 만들었으며, 이 영화는 세 편의 리메이크작을 낳았다.[5]텔레비전에서는 ''황혼의 영역''의 두 에피소드인 "사이먼 삼촌(Uncle Simon)" (1963)과 "살바도르 로스의 자기 계발(The Self-Improvement of Salvadore Ross)" (1964)를 연출했고, ''제시 제임스의 전설'' (1965)의 프로듀서였다.[6]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텔레비전이 부상하는 가운데, 시겔은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도 다수 담당했는데, 이는 자서전에 따르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64년의 『킬러들』은 원래 텔레비전 드라마용으로 만들어졌지만, 폭력적인 내용과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영향으로 극장 공개되었다.
그는 영화 ''라인업(The Lineup)''에서 엘리 월라치(Eli Wallach)와, 영화 ''타오르는 별(Flaming Star)'' (1960)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돌로레스 델 리오(Dolores del Río)와, 영화 ''지옥의 영웅들(Hell Is for Heroes)''에서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과, 그리고 영화 ''킬러들'' (1964)에서 리 마빈(Lee Marvin)과 함께 작업했다.
3. 3. 클린트 이스트우드와의 협업 (1968-1979)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유니버설 픽처스가 주목하던 배우였다. 1968년, 이스트우드 주연의 매혹의 도시 감독 선정은 난항을 겪었다. 이스트우드가 시겔의 이름을 언급했고, 마크 라이델이 시겔을 강력히 추천하여 감독으로 결정되었다.[4] 시겔과 이스트우드는 촬영을 통해 의기투합하여, 다음 해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 다시 협업하며 유대감을 깊게 했다.[4]1971년은 두 사람에게 중요한 해였다. 이전까지 두 사람의 경력과는 다른 서스펜스 영화 매혹의 밤을 발표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시겔은 이 작품을 최고 걸작으로 평가했다. 같은 해 더티 해리가 크게 흥행하며 두 사람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스트우드는 첫 감독 작품인 어둠의 그림자를 발표했고, 시겔은 바의 마스터 역으로 출연했다.[4]
1979년 알카트라즈 탈출은 이스트우드와 시겔의 마지막 협업 작품이 되었다. 이후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또 다른 스승인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시겔에게 헌정했다.[4]
시겔은 이스트우드의 영화 5편을 연출하며 비평가들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5] 이 영화들에는 액션 영화 쿠간의 함정과 더티 해리, 앨버트 말츠가 각본을 쓴 서부극 사라 부인에게, 미국 남북 전쟁 멜로드라마 매혹당한 사람들, 탈옥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이 포함된다. 시겔은 이스트우드의 감독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5]
3. 4. 후기 작품 활동 (1980-1982)
시겔은 작곡가 랄로 시프린(Lalo Schifrin)과 오랜 협력 관계를 가졌으며, 시프린은 ''쿠간의 함정'', ''매혹당한 사람들'', ''더티 해리'', ''찰리 배릭(Charley Varrick)'', ''텔레폰''(Telefon) 등 시겔의 영화 다섯 편의 음악을 담당했다. 시프린은 ''징크스!(Jinxed!)'' (1982)에서 시겔을 위해 여섯 번째 악보를 작곡하고 녹음했지만, 시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튜디오에서 거부당했다. 이 갈등은 시겔이 마지막 영화에서 겪었던 여러 싸움 중 하나였다.[7]1980년대에 시겔은 프로듀서와의 갈등으로, 뜻대로 제작이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유작이 된 ''징크스!''에서는 제2팀 감독으로 제자인 샘 페킨파(Sam Peckinpah)가 참여하여 시겔을 격려했지만, 2년 후 페킨파는 사망했다.[9][10]
4. 샘 페킨파와의 관계
샘 페킨파는 1954년 영화 《감방 11호의 폭동(Riot in Cell Block 11)》에서 대사 코치로 고용되어 감독 돈 시겔의 조수 역할을 했다. 이 영화는 폴섬 교도소에서 촬영되었는데, 시겔이 현장에서 작업하고 실제 수감자들을 엑스트라로 활용하는 모습은 페킨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8] 페킨파는 이후 시겔의 영화 《비밀 지옥 36(Private Hell 36)》(1954), 《아나폴리스 스토리(An Annapolis Story)》(1955), 《신체 강탈자(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1956), 《거리의 범죄(Crime in the Streets)》(1956) 등 네 편에서 대사 코치로 일했다.[8]
25년 후, 페킨파는 문제 많은 영화 제작으로 인해 업계에서 거의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시겔은 페킨파에게 영화 제작으로 복귀할 기회를 주었다. 시겔은 자신의 영화 《징크스!》에서 12일 동안 세컨드 유닛(second unit)을 연출할 의향이 있는지 페킨파에게 물었고, 페킨파는 즉시 수락했다. 오랜 친구와의 진지한 협력은 업계의 주목을 받았고, 페킨파는 이 작업을 통해 크레딧에는 기재되지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영화 《오스터만 주말(The Osterman Weekend)》(1983)의 감독으로 고용되는 계기가 되었다.[9][10]
5. 작품 스타일 및 영향
돈 시겔은 예산과 각본의 한계를 뛰어넘어 흥미롭고 숙련된 작품을 제작하며 어떤 종류의 자료든 연출했다.[5] 그는 2014년 ''가디언(The Guardian)''에서 "운명론적인 걸작"이자 "SF 장르의 시금석"이라고 묘사된 영화 ''신체 강탈자(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를 만들었으며, 이 영화는 세 편의 리메이크작을 낳았다.[5] 텔레비전에서는 ''황혼의 영역''의 두 에피소드인 "사이먼 삼촌(Uncle Simon)" (1963)과 "살바도르 로스의 자기 계발(The Self-Improvement of Salvadore Ross)" (1964)를 연출했고, ''제시 제임스의 전설'' (1965)의 프로듀서였다.[6]
그는 영화 ''라인업(The Lineup)''에서 엘리 월라치(Eli Wallach)와, 영화 ''타오르는 별(Flaming Star)'' (1960)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돌로레스 델 리오(Dolores del Río)와, 영화 ''지옥의 영웅들(Hell Is for Heroes)''에서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과, 그리고 영화 ''킬러들(The Killers)'' (1964)에서 리 마빈(Lee Marvin)과 함께 작업했다.[6]
시겔은 작곡가 랄로 시프린(Lalo Schifrin)과 오랜 협력 관계를 가졌으며, 시프린은 ''쿠간의 함정'', ''매혹당한 사람들'', ''더티 해리'', ''찰리 배릭(Charley Varrick)'', ''텔레폰(Telefon)'' 등 시겔의 영화 다섯 편의 음악을 담당했다.[7]
시겔은 또한 감독 샘 페킨파(Sam Peckinpah)의 경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54년, 페킨파는 ''감방 11호의 폭동(Riot in Cell Block 11)''의 대사 코치로 고용되었으며, 시겔의 조수 역할을 했다. 이 영화는 폴섬 교도소에서 촬영되었다. 시겔의 현장 작업과 영화에 실제 수감자들을 엑스트라로 사용한 것은 페킨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비밀 지옥 36(Private Hell 36)'' (1954), ''아나폴리스 스토리(An Annapolis Story)'' (1955), ''신체 강탈자'' (1956), ''거리의 범죄(Crime in the Streets)'' (1956) 등 시겔의 영화 네 편에서 대사 코치로 일했다.[8]
5. 1. 작품 스타일
감상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폭력적인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그가 연출가로서 성장한 1950년대 할리우드 B급 영화라는 환경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1]B급 영화의 저예산, 속성 촬영이라는 제작 환경 속에서 시겔은 장인적인 연출을 터득해 갔다. 그는 각본 단계부터 면밀한 협의를 반복하여 작품의 이미지를 굳히고, 현장 촬영에서는 불필요한 숏을 일절 찍지 않는다는 히치콕과 같은 연출 스타일로 작품을 계속해서 찍었다. 이스트우드는 이러한 효율적인 연출을 직접 접하고 감명을 받아 현재까지 이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1]
5. 2.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미친 영향
시겔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5편을 연출하여 비평가들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작으로는 액션 영화 ''쿠간의 함정(Coogan's Bluff)''과 ''더티 해리(Dirty Harry)'', 앨버트 말츠(Albert Maltz)가 각본을 쓴 서부극 ''사라 부인에게(Two Mules for Sister Sara)'', 미국 남북 전쟁 멜로드라마 ''매혹당한 사람들'', 탈옥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Escape from Alcatraz)''이 있다.[6] 그는 이스트우드의 감독 경력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스트우드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는 "돈과 세르지오에게" 헌정되었다.시겔은 B급 영화의 저예산, 속성 촬영 환경 속에서 각본 단계부터 면밀한 협의를 통해 작품의 이미지를 굳히고, 현장 촬영에서는 불필요한 장면을 일절 찍지 않는 히치콕과 같은 연출 방식을 터득했다. 이스트우드는 이러한 효율적인 연출 방식에 감명을 받아 현재까지 이를 실천하고 있다.
6. 사생활
시겔은 비비카 린드포스(1948년~1953년), 도 아베돈(1957년)과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 비서였던 캐롤 라이달과 결혼하여 1991년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캘리포니아주 니포모에서 암으로 사망했으며, 카유코스-모로 베이 지구 묘지에 묻혔다. 무신론자였다.[11]
6. 1. 결혼과 이혼
시겔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배우 비비카 린드포스와 결혼했고, 슬하에 아들 크리스토퍼 타보리를 두었다.[11] 1957년에는 도 아베돈과 결혼하여 네 명의 아이를 입양했으나, 1975년에 이혼했다.[11]이후 시겔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 비서였던 캐롤 라이달과 결혼했으며, 1991년 캘리포니아주 니포모에서 78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11]
6. 2. 사망
시겔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 비서였던 캐롤 라이달과 결혼했다. 시겔과 라이달은 그가 78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니포모에서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시겔은 해안의 카유코스-모로 베이 지구 묘지에서 1번 고속도로 근처에 묻혔다. 그는 무신론자였다.[11]7. 참여 작품
연도 | 제목 | 비고 |
---|---|---|
1942 | 지금, 항해자로 | 몽타주 |
1942 | 태평양 횡단 | 몽타주 감독 |
1942 | 카사블랑카 | 몽타주 감독 |
1943 | 더 하드 웨이 | 몽타주 감독 |
1945 | 밤의 별 | 단편 |
1945 | 히틀러는 살아있다 | 다큐멘터리 단편, 크레딧 없음 |
1946 | 더 버딕트 | |
1949 | 밤은 밤으로 | |
1949 | 빅 스틸 | |
1952 | 실버 크릭의 결투 | |
1952 | 꽃을 위한 시간은 없다 | |
1953 | 시간을 세어라 | |
1953 | 차이나 벤처 | |
1954 | 감방 11번의 폭동 | |
1954 | 프라이빗 헬 36 | |
1955 | 블루 앤 골드 | |
1956 | 신체 강탈자들의 침략 | |
1956 | 거리의 범죄 | |
1957 | 베이비 페이스 넬슨 | |
1957 | 스페니쉬 어페어 | |
1958 | 총잡이 | |
1958 | 더 라인업 | |
1959 | 하운드-도그 맨 | |
1959 | 영원의 가장자리 | 크레딧 없음 |
1960 | 불타는 별 | |
1962 | 지옥은 영웅들을 위한 곳 | |
1964 | 킬러 | |
1964 | 교수형된 남자 | |
1967 | 도망가는 낯선 자 | |
1968 | 쿠간의 함정 | |
1968 | 매디건 | |
1969 | 건파이터의 죽음 | 앨런 스미티로 크레딧 |
1970 | 사라 자매를 위한 두 마리의 노새 | |
1971 | 더 비거일드 | |
1971 | 더티 해리 | |
1973 | 찰리 배릭 | |
1974 | 블랙 윈드밀 | |
1976 | 더 슈티스트 | |
1977 | 텔레폰 | |
1979 | 알카트라스 탈출 | |
1980 | 러프 컷 | |
1982 | 징크스! |
참조
[1]
뉴스
Don Siegel, Whose Movies Herald Tough, Cynical Loners, Dies at 78
https://www.nytimes.[...]
1991-04-24
[2]
서적
The Jew in American Cinema
Indiana University Press
1988-08
[3]
웹사이트
Illinois, Cook County, Birth Certificates, 1871-1949
https://www.familyse[...]
Donald Siegel, 26 Oct 1912.
2024-01-06
[4]
문서
Munn, p. 75
[5]
뉴스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Don Siegel's fatalistic masterpiece
https://www.theguard[...]
2014-10-27
[6]
서적
Television Westerns: Six Decades of Sagebrush Sheriffs, Scalawags, and Sidewinders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11-06
[7]
뉴스
Reported by the Los Angeles Times in 1982.
Los Angeles Times
1982
[8]
서적
If They Move...Kill 'Em!
Grove Press
[9]
서적
If They Move...Kill 'Em!
Grove Press
[10]
웹사이트
"Jinxed!"
https://www.imdb.com[...]
2012-03-06
[11]
뉴스
Don Siegel's stories
The Times
197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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